고대 식물이었던 자이라는 시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인간의 몸을 빌어 자기 영혼을 옮겨 심고 새 생명을 갖게 되기 전 까지는... 수백 년 전 쿠뭉구 정글을 지배하던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식물들이었다. 자이라를 비롯한 식육 식물 일족은 정글에 발을 들여놓는 동물들을 덩굴손으로 휘감아 생명력을 빨아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동물의 수는 점점 줄어만 갔고, 먹잇감이 사라져버린 식육 식물들이 하나 둘씩 시들어 죽는 광경을 자이라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홀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체념한 그녀의 앞에 조심성 없는 여자 마법사 한 명이 나타났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자이라는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뒤바꿀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이렇게 가까이까지 다가온 건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엔 굶주림이 자이라를 마법사의 육체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마음 속 더 깊은 곳에서 어떤 본능이 고개를 쳐들었다. 단박에 마법사를 덩굴로 휘감고 마지막 만찬을 즐기려던 찰나, 알 수 없는 이질적인 기억들이 자이라의 정신을 관통했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 번성하는, 바위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글의 모습이었다. 강력한 마법의 힘이 덩굴을 타고 흘러들자 자이라의 머릿속에 명쾌하고도 위험천만한 어떤 방도 하나가 떠올랐다. 이 마법사의 기억을 참고하여 인간의 형체를 창조해 내고 그녀에게서 훔친 마법을 부어 자신의 존재를 담아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이제 와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터였다.
이윽고 눈을 뜬 자이라는 손끝이라는 것을 놀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자신이 새로 얻게 된 이 짐승 같은 힘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이라는 자신의 원래 신체였던 식육 식물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아주 연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군. 더는 촘촘하게 얽힌 덩굴이 되어 도망갈 수도, 다시 생명을 피워낼 수 있는 뿌리도 없으니, 이 몸이 스러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난생 처음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본 그녀의 입가에 어두운 미소가 스르르 번졌다. 짐승의 삶을 택한 그녀는 식물이었을 때보다 한층 더 정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 생명과 두 다리를 얻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꽃을 꺾으려고 들다간, 가시에 찔리게 마련이야.''
-- 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