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해줄까?''
''저 어린애 아니에요, 할머니.''
''옛날이야기는 아이들만 듣는 게 아니란다.''
입씨름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소녀는 얌전히 침대에 들어가서 몸을 웅크렸다. 창밖에선 매서운 바람이 불고, 살며시 떨어지던 눈발이 사나운 눈보라가 되어 휘몰아쳤다.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얼음 마녀 이야길 해줄까?'' 노부인이 물었다.
''아니요, 그거 말구.''
''그럼 브라움 이야긴 어때?'' 소녀는 말이 없고, 노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브라움에 대한 얘긴 밑천이 떨어지지 않는단다. 이 할미의 할머니께서도 자주 브라움 이야기를 해주셨지. 무시무시한 용을 물리치고 마을을 구한 이야기였어. 한 번은 용암이 흐르는 강을 용감하게 뛰어 내려갔지. 아주 아주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란다. 음... 아하!'' 무슨 상념에 잠긴 것처럼 잠깐 말이 없던 노부인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브라움이 어떻게 그 방패를 갖게 됐는지 이야기해줬던가?''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난롯불이 타오르며 찬 바람을 밀어냈다.
''옛날 옛날에 브라움이라는 남자가 우리 마을 뒷산에 살고 있었어요.''
''그 이야긴 알아요!''
''브라움은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었지. 평소엔 농장에서 양과 염소를 쳤단다. 얼굴엔 항상 근사한 미소를 띠었고, 인사하면 호탕한 웃음소릴 들려주었지.''
''그런데 어느 날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났어. 어린 트롤 소년이 산을 타다가 동굴을 발견했거든! 아마 우리 손주 또래의 소년이었을 거야. 어쨌든, 거대한 돌이 동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단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거대한 문이었어! 투명한 얼음 조각이 문의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지. 그 문을 열자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단다.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했던 거야.''
''우리 불쌍한 트롤 소년은 신이 나서 동굴 속으로 뛰어들어갔지.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돌문이 '쿵!'하고 닫혔단다. 사실 그 동굴은 얼음 마녀가 저주를 걸어놓은 함정이었던 게지.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소년이 동굴 속에 갇히고 만 거야!''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양치기가 소년의 울음소릴 들었지. 모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마을에서 가장 힘센 전사들도 문을 열진 못했단다. 소년의 부모님은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머니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산 곳곳으로 메아리쳤단다. 다들 점점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어.''
''그런데 별안간 저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단다.''
''브라움이군요!''
''그렇지! 브라움이 울음소리를 듣고 단숨에 산에서 내려온 거야. 트롤 소년이 저주받은 동굴에 갇혀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말해주자 브라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문 앞에 섰단다. 그리곤 문을 밀고 당겼지. 주먹으로 내리쳐 보기도 하고 발로 차 보기도 하고 경첩에서 떼 보려고도 했단다. 그러나 문은 절대 꼼짝도 하지 않았어.''
''어? 왜요? 브라움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잖아요!''
''그래, 이상한 일이었지.''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움은 커다란 바위에 앉아 방법을 생각했단다. 나흘 밤낮을 꼬박 새웠지만, 방도가 잘 떠오르지 않았어.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웠지.''
''그런데 다섯째 날 해가 떠오르는 순간 브라움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는 활짝 웃더니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없다면 다른 데를 뚫으면 되지.'라고 말했단다.''
소녀는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산이군요!''
''그렇지! 브라움은 산 정상으로 가서 무작정 아래로 길을 뚫어 나갔어. 바위를 계속해서 주먹으로 내리치니 돌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지. 곧 브라움은 저어기 어둡고 깊은 곳으로 사라졌단다.''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숨을 죽였어. 그때 갑자기! 정적을 깨고,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어. 마법이 걸린 문 주변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지. 잠시 후 모든 것이 선명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은 브라움을 발견했단다. 기뻐하는 트롤 소년을 팔에 안아 들고 금은보화 한가운데 서 있었지. 조금은 지쳐 보였단다.''
''역시 브라움이네요!''
''그런데 기뻐할 틈도 없었단다. 브라움이 뚫은 터널 때문에 산이 휘청거리기 시작했거든. 모든 게 우르릉 쾅쾅 무너지기 시작했어. 브라움은 잽싸게 머리를 굴려 마법이 걸린 돌문을 집어 들었고, 떨어지는 돌들을 막아내기 위해 방패처럼 머리 위로 들어 올렸지. 산이 잠잠해진 후 고개를 든 브라움은 놀랄 수밖에 없었어. 돌문에는 흠집 하나도 나지 않았거든! 대단한 물건인 걸 깨달았지. 그 날 이후로 브라움은 언제나 그 마법의 방패와 함께였단다.''
소녀는 신이 난 내색을 하긴 싫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노부인은 잠깐 기다리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그만 나가려고 일어섰다.
소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부인을 불렀다. ''할머니, 하나만 더 해주시면 안 돼요?''
''내일.''
노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촛불을 껐다.
''지금은 잘 시간이란다. 게다가 브라움의 이야기는 끝없이 많거든.''